2012년 9월 30일 일요일

막스베크만_01


막스 베크만 [ MAX BECK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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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1884년 2월 12일 ~ 1950년 12월 27일
출생지-사망지독일 라이프치히 - 미국 뉴욕
예술양식자화상, 거대한 규모의 트립티크, 대담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채, 복잡하고 우의적인 구성,
신화와 풍경, 가면을 쓴 인물들을 주로 그림
20세기 독일 미술계를 이끌었던 화가 중 한 명인 막스 베크만은 다양한 양식을 넘나들며 작업했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의 유파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베크만은 파리에서의 짧은 체류 후, 1904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10년에 그는 유명한 베를린 분리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베크만의 초기작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위생병으로 복무한 후, 그의 미술 양식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죽거나 불구가 된 군인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공포를 목격한 베크만은 충격을 받아 신경쇠약에 걸려 결국 1915년에 제대하게 되었다.

베크만이 마침내 다시 붓을 들게 되었을 때, 그가 그린 작품들은 그 자신이 겪은 불안과 공포, 정신적 외상의 반영이었다. 그는 사회적, 종교적, 신화적 주제를 다루었는데, 복장을 한 인물들의 알레고리적인 사용의 증가뿐만 아니라 더욱 강렬해진 색채, 그리고 공간과 형태의 뒤틀린 묘사에서 그의 그림들은 입체주의 양식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준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베크만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립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독일미술 명예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표현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를 옹호했던 미술 운동인 신즉물주의 그룹의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후 그의 운명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나치는 근대 미술을 사회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크만의 미술을 퇴폐적이라고 낙인찍은 나치는 그의 작품을 500점이 넘게 몰수했다. 근대 미술을 탄압하기 위해 나치가 기획했던 악명 높은 '퇴폐 미술전'(1937)에는 베크만의 작품도 열 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시회의 개막일 다음 날, 베크만은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가난과 압제에도 불구하고 베크만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서사시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담은 그의 트립티크(3면화) 연작은 베크만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생의 마지막 3년을 보냈다. 미국에서 그는 풍경과 고층 빌딩, 그리고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린 또 다른 트립티크 작품을 완성했다. 마지막 작품인 <아르고선의 선원들>(1950)은 베크만이 죽기 하루 전날에 완성한 것이다.

수수께끼 트립티크
베크만은 독일의 중세 미술과 트립티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학생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화폭에 구현하는 능력은 변화하는 시대를 기록하고자하는 화가의 열망을 담고 있다. <출발>(1933)은 나치당의 폭정을 상징하는 어둡고도 억압적인 양쪽 패널과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은 듯한 중앙의 밝은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신화적인 상징주의는 이후에 그리는 트립티크 작품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나치 정부에 압수당할 것을 우려한 베크만은 작품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장면들'이라는 알 수 없는 제목을 붙여 다락방에 감춰두었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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