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일 월요일

네오 라우흐_04


네오 라우흐[Neo Rauch,1960.4.18~ ]

구동독 출신의 화가.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기수로 사회주의 사실주의 회화의 계보를 잇는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독일 작가이다. 독일의 역사를 주제로 삼은 그의 회화는 정치적인 알레고리 혹은 이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독일 라이프치히
주요작품
《정찰병 Späher》(2002), 《황금 Gold》(2003), 《음모 Konspiration》(2004), 《아버지 Father》(2007), 《파라 Para》(2007)
1960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그는 1980년대를 거쳐 10년 동안 라이프치히 미술 아카데미(Hochschule für Grafik und Buchkunst: HGB대학)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93년 화랑업자인 게르트 해리 립케(Gerd Harry Lybke)의 눈에 띄면서 국제 미술시장에 데뷔하였다.

라우흐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회화의 계보를 잇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 New Leipzig School"의 기수로 21세기에 다시 회화의 열풍을 몰고 온 차세대 독일작가 중 가장 촉망받는 작가이다. 영국에 yBa(young British artists)가 있다면, 독일에는 yGa(young German artists)가 있고, 그 한가운데 라우흐가 있다고 보면 된다.

그의 작품은 독일의 역사라는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을 주제로 삼는다. 옛 동독에서의 성장 경험과 냉전의 종식, 서독과의 통일로 인해 새로 접하게 된 서구 자본주의, 그리고 정신적,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 속에 부유한다. 또한 음울한 긴장감이 감도는 화폭 안에 수많은 내러티브와 상징을 담아내며, 거칠고 조악해 보이는 채색효과로 오래된 광고 포스터나 만화책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라우흐는 자신의 회화에 대하여 "나의 회화는 사회주의를 주제로 하여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사이를 오가는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동독 공산체제의 어두운 이면을 회상하고, 그에 못지않게 불투명한 현재와 미래를 낯선 이미지로 보여주는 그의 회화는 우울한 낭만주의와 내면적 심오함을 겸한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2002년 빈센트 반 고흐 상을 수상했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잇단 전시를 가졌고, 2004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알베르티나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 루벤스와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전시를 가진 바 있다. 몇 년을 기다려야 작품을 소장할 기회가 생길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의 부인 로자 로이(Rosa Loy) 역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화가이다.

주요 작품에는 《정찰병 Späher》(2002), 《황금 Gold》(2003), 《음모 Konspiration》(2004), 《아버지 Father》(2007), 《파라 Para》(2007) 등이 있다

네오 라우흐_03


미술시장 – 미술대중

혈액순환과 신경계가 인간의 총체적 유기체에 속하면서도 서로 다른 시스템을 구성하듯 미술작업 역시 미술시장과 미술대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미술시장과 미술대중은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예술의 집, 뮌헨, 경매 사전답사; Cop: picture-alliance/ dpa
경매 사전답사
미술시장 역시 마찬가지지만 시장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물건을 생산하고, 유통경로를 조직하고, 수익을 남기고, 일자리를 만들거나 또는 없애거나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며 지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장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의미 창출이다. 화가들은 직업적 위험부담을 안고 자신들이 개별적으로 획득한 것을 불안한 심정으로 대중에게 내놓는데, 미술시장은 장기적으로는 이런 작가들 없이는 내놓을 물건도 보유하지 못한다. 세상에 대한 시각적 및 예술적 해석과 내용, 지속적인 점검, 변경 및 갱신 그리고 그 평가에 관한 기준은 살아 숨쉬는 예술의 현장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미술평론을 통한 언어화된 해석도 속한다.
베르너 튑케의 '팔레트를 든 자기 초상화' (1971); Cop: picture-alliance/dpa / 예술가 저작권 협회, 본 2011
베르너 튑케의
'팔레트를 든 자기 초상화'
미술대중은 언제나 생겨나며 수시로 다시 자라난다. 두 명의 작가가 자신들이 현재 작업하거나 다른 이에게서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대개 함축된 미학적 평가 기준을 가져와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업데이트하고, 변경하며 확장시켜 나아간다. 이런 사용을 통한 지속적인 갱신은 신문의 문예란이나 인터넷의 미술평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술대중은 작품을 그 고유의 정당성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기준을 배경으로 평가하지 시장의 물건가치로 평가하지는 않는다.미술시장과 미술대중의 이론적 차이는 사회적 현실에서 상호적으로 강력하게 뒤엉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괄목할만한 상업적 성공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동독 미술계에서 베른하르트 하이직(Bernhard Heisig), 볼프강 마토이어(Wolfgang Mattheuer) 그리고 베르너 튑케(Werner Tübke)가 중축을 이루던 “구 라이프치히 화파”의 미술적 영향을 하나의 브랜드로 압축시켰다. 이는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한 홀거 붕크(Holger Bunk) 또는 디르크 스크레버(Dirk Skreber)와 같은 작가들과 “신 라이프치히 화파” 사이의 예술적 유사성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무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디르크 슈미트의 '봉기'; Cop: EIGEN + ART 화랑 베를린/라이프치히 / 예술가 저작권 협회, 2011
디르크 슈미트의 '봉기'
“라이프치히 화파”에서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넘어가는 현대미술에서 아르노 링크(Arno Rink)의 제자이자 베른하르트 하이직의 마이스터쉴러(Meisterschüler)인 네오 라우흐(Neo Rauch, 1960년생)는 왕권에 가까운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라이프치히 화파”의 성공적인 젊은 작가들 중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표주자인 그는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배경조각들, 상황적 맥락 없는 동작과 결부된 강렬한 개개의 인물들 그리고 표면적인 색상대조를 거의 그래픽에 근접한 구성성에 의거해 강한 인상을 주는 화풍으로 합성했다. 장면 이야기적 파편들과 서로 자폐증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인물들을 용해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무대 수수께기로 엮어내는 네오 라우흐의 기교는 최고 수준이다. 그는 관찰자에게 참여자가 될 것을 강하게 호소한다.
틸로 바움게르텔의 '소냐', 종이 위에 목탄, 150 x 250 cm, 2006; Cop: 크리스티안 에어린트라우트, 베를린
틸로 바움게르텔의 '소냐'
네오 라우흐의 커다란 성공은 상황적 연속체 바깥의 인물을 그리는 또 다른 젊은 “라이프치히 화파”인 틸로 바움게르텔(Tilo Baumgärtel, 1972년생)로 하여금 비삽화 수준에 대한 복잡한 형상화 및 이미지 심리학의 새로워진 수요를 제시하게 했다.




홀거 붕크의 '이중 공간'; Cop: 예술가 저작권 협회, 본 2011
홀거 붕크의 '이중 공간'
이와 유사한 노력은 이미 1980년대에 뒤셀도르프에서 홀거 붕크(Holger Bunk, 1954년생)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역시 회화의 만능 탈랜트이자 단순한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 심리학자이다.










팀 아이텔의 '잿빛 구름', 2004, 캔버스 위에 유화, 250x190xm, 개인소장, 베를린; Cop: EIGEN + ART 화랑 베를린/라이프치히 그리고 Pace/Wildstein / 예술가 저작권 협회, 2011
팀 아이텔의 '잿빛 구름'

라이프치히 사람인 아르노 링크의 서독 출신 제자 팀 아이텔(Tim Eitel, 1971년생)은 대형 화폭을 쓰는 자신의 현실주의적 회화에서 눈앞에 있는 각각의 이미지 대상에 그래픽에 훈련된 고립을 적용한다. 인간의 형상 또는 건물들의 뚜렷한 윤곽은 공간이 사라진듯한 거대한 화폭에 경계를 긋는다. 다중적 의미를 가진 그림은 명확한 개념으로, 즉 의도한 바가 모호하지 않은 표현으로 옮겨진 듯하다. 그러나 고립, 다시 말해 모든 맥락으로부터 의도한 바를 떼어내는 것은 곧바로 그림 효과를 규정하는 요소, 즉 본래의 테마가 된다.

다비드 슈넬의 '홈'; Cop: EIGEN + ART 화랑 베를린/라이프치히 / 예술가 저작권 협회, 2011
다비드 슈넬의 '홈'
이와 비슷하게 모순적인 효과 산정은 역시 링크의 서독 출신 제자인 다비드 슈넬(다비드 슈넬의, 1971년생)의 작업에서도 두드러진다. 강한 색채로 캔버스의 앞쪽까지 공간을 채운 그의 풍경화는 공허함을 불러일으킨다. 곡물창고의 기하학적인 널빤지, 곧추세운 나무 또는 사각형 건초뭉치는 시골 풍광보다는 컴퓨터게임이 고향인듯하다. 슈넬은 탁월한 솜씨로 구심점 없는 활력, 분명하지 않은 물성의 배경인듯한 화려함 그리고 가물거리는 화면의 고의적인 비구속력을 통해 공간의 깊이로 빨아들이는 원근법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관찰자가 그림을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바라볼 때 하늘 아래 자연이 눈앞의 체험 상실로 이어지게 만든다.
마티아스 바이셔의 '구석'; Cop: EIGEN + ART 화랑 베를린/라이프치히 / 예술가 저작권 협회, 2011
마티아스 바이셔의 '구석'
마티아스 바이셔(Matthias Weischer, 1973년생)는 이 같은 체험을 인테리어 설치를 통해 엇비슷하게 자아낸다. 바닥과 벽은 녹청색으로 숨쉬며, 분해된 공간은 사람이 사는 듯하면서도 텅 비어있어서 극적으로 암시적이며 우울하다. 슈넬과 바이셔는 환상주의는 환상주의일 뿐이라는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디르크 스크레버의 'Untitled 2'; Cop: 예술가 저작권 협회, 본 2011
디르크 스크레버의 'Untitled 2'
이런 자세는 그림의 분위기로 볼 때 분명 디르크 스크레버(Dirk Skreber,1961년생)의 작품세계에도 반영된다. 새가 조망한 듯한 텅 빈 운동경기장의 대형 그림, 미래주의에 대한 향수병으로 느껴지는 옛 고층건물 환상 또는 흐늘흐늘하게 탈색된 기관차 등과 같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매정하게 창작된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스크레버의 그림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현실적인 시각을 묘사하는 것인지, 아니면 꿈속의 그림을, 그도 아니면 장난감 풍경을 표현한 것인지는 명료하지가 않다.„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게 된 전조는 동독체제가 끝나가던1980년대 후반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전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와 같은 보수성향의 서독 수집가 및 미술관계자들은 베른하르트 하이직과 베르너 튑케의 화풍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 그림들이 발산하는 탁월한 솜씨와 세련됨의 가치 그 자체에 매료되었다. 회화작업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전문적 교육, 예술사학적 과거의 특정 화풍에 관한 정확한 견문 그리고 젊은 작가이면서도 과거 기법에 끌려들어가는 능력과 의지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보수적인 독특성에 기인한다. 개별적 요구와 기준에 대한 미술적 내부담론과 미술시장 사이의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술적 자기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신 라이프치히 화파”는 보수적이고 정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술시장에 관한 한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
마티아스 빈첸 (Matthias Winzen) 교수
자르(Saar)주 예술대학에서 예술사와 예술이론을 가르침
번역: 정민기
저작권: 괴테-인스티투트, 온라인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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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네오 라우흐_02


"화가의 무기를 가지고...독일 라이프찌히 태생의 화가 Neo Rausch에 대하여(상)"
bild1:"계곡"(200x250cm.1999)
하늘은 높다. 전봇대는 하늘을 찌른다. 농가와 공장들은 텅 비어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없다.라이프찌히 근교의 풍경은 Neo Rauch의 어느 그림속으로 스며든다. 1960에 태어난 화가 Neo Rauch가 붓을 잡으면, 어느 도로인가는 교통이 중단되고,가로수로 이어진 길은 공허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능숙함도 전선의 정리된 구조와 길과 들판들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즉물주의(Sachlichkeit)와 초현실주의(Surrealismus)는 Neo Rauch에게 상호적으로 관여되지 않는다. Neo Rauch의 그림들은 혼란하지못해 심란하기까지 하다. 비록 그가 꼭 그런 경향때문 만은 아니지만 그는 성과를 거두었다. 독특한 회화와 예술시장이 몇년 전부터 호황인 미국에서 더욱 그렇다.그의 작업을 수집하는 이들은 그의 전속갤러리의 Gerd Harry Lybke로 부터 그의 작업을 남김 없이 사들인다. 더불어 이곳 독일에서도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다. Rausch는 예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라이프찌히의 현대미술관 두층 모두에서 전시하는 기회를 얻은 이후 몇달간 많은 관람자에게 알려질 것이다.
bild2:(134x192cm.2000)
그의 전시는 라이프찌히에 이어 뮌헨, 쮜리히, 만하임, 베를린, 그리고 다시 라이프찌히에 이어 계속 전시 될 예정이다. 이제까지 스스로 외소하게 느끼왔던 한 예술가,그리고 오랜시간 동안 문화계에서 동쪽의 외부초소로만 여겨져 왔던 그의 고향 라이프찌히가 이제는 국제적인 관심에 휩싸였다. 작센주는 휴일과 같이 고요하고, 라이프찌히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상관없다.우리는 어떻든 간에 복무에 들어 갔을 것이다."여기서 "복무"라 함은 그의 아틀리에 책상위에 놓여 있는 총과 함께를 말함이 아니고 라이프찌히 동쪽의 소도시 Plagwitz에 있는 목화 방적 공장의 아틀리에에서의 작업을 말함이다. 이 공장은 1989년 변환기때에 작업이 중단되고 기억을 위한 보존건물로 지정되었다. 그 건물 일부분을 약 30명의 예술가들이 임대하여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이 가스총은 여름에 과일위에 앉아 있는 벌레들을 잡기위해 사용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벽에 걸린 표적판에는 몇개의 총구가 보인다, 라이프찌히 화가들의 대부분그림들은 전쟁에 대한 경향을 띠고 있다. "해군학교"또는"작전"이란 전시제목을 뤼벡이나 라이프찌히의 전시에 사용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탱크나 비행기들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총기가 그려진 어떤 그림은 하필 1963년 미국대통령 John, F, Kennedy 가 암살당한 미국 Dalls의 한 미술관에 팔렸다. 여기 그림속에 누군가 자신의 병역생활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누군가가 있는가? "우리의 일상용어는 완전히 군대개념으로 가득차있고, 20세기 예술도 Avantgarde부터 오늘날 유행하는 Intervention까지 군사적인 용어로 무장되어 있다. 아마도 군사적인 특수용어가 더 높은 조형성을 가진 정확한 언어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Rausch는 말한다. 그는 軍을 그리면서 예술내에서도 항상 새로운 것으로 인정받으려 앞으로 나서는 전위예술의 전투적인 드러남을 비웃는다. "NEO", "새로움"을 뜻하는 그의 이름을 그는 차라리 전통이나 완만함을 위한 "고집"으로 여긴다는 뜻으로 "나는 페라리 자동차로 이동중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탱크나 굴착기,공장 그리고 작업장은 모든기술을 가진 한 소년의 매혹을 이야기 하며 그는 그의 어린시절을 돌이킨다. 60년대 동독에서는 술래잡기같은 아이들의 놀이가 "작전"이라고 불리어 졌었다. 그 당시 그는 그의 부모가 그가 태아난지 6개월만에 기차사고로 인해 사망한 이후로 새로 지은 한 단지에서 그의 할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보냈다. 그는 여름에 도로의 Teer(타르)가 물렁해지면 그것을 때어내서 버터를 바르지 않고는 손을 닦을 수 없을 때까지 검고 작은 인간상을 만들곤 했다 한다.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Teer도 이 시절에서 연유한다: 두꺼운 Teer가 건물 모형에서 부풀어 오른다.
bild3:"위치"(200x250cm,2000)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꿈처럼 무의식속에 솟아오르고 다른 인식들과 환상적인 모습들 속으로 섞이며 화폭위에 오르길 요구한다. 이러한 것들을 그는 "눈썰미 그림"이라고 부른다. 이런기억의 화면들은 언어를 통해 잡아두려 해도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의 화면들을 인물이나 사물로 표현하는것이 Neo Rausch에게는 추상을 요구하는 이 현시대 속에선 큰 어려움였다. 그는 처음 Werner Tuebike에 감탄했고, Arno Rink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Bernhard Heisig의 제자로 공부했다. 처음에 표현적인 작업을 했고, 그후 인포멜의 대표자라도 된듯 온몸으로 작업을 하며 낯선 스타일에 도취감을 느끼곤 했다. 확실한 것은,,, 처음의 난무한 색과 격한 붓놀림에는 1980년대 동독의 암울한 부동적임에 대한 반항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격동적이고 망설임 없이 보일수록 자신만의 길을 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에게 더해져 갔다. "나에게 이것은 어떠한 완벽함도 가져다 주질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이건 확실했다. 나에겐 완벽한 추상이란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말이 많다."라고 그는 말하며 덧붙히기를..."나에겐 삼각형의 창조자 보다는 어느날 집으로 가는 한 형상의 창조자로서가 나에게 더 만족을 가져다 준다." 그림들과 움직임들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파블로 피카소.게오르그 바젤리츠. 마쿠스 뤼페르쯔 등 20세기 후반의 구상회화의 전통이 자극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대학수업 첫해에 데이비드 호크니의 팜플렛이 반(Klasse)에 돌았다. 그 영향으로 그는 잠시 팝아트에도 손을 댔었다.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라고 한다. 1988년 그가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보았을때 그 야생적이고 절대적인 형상앞에 할말을 잃었었다. "왜냐면 한 어린 촌놈이 그 위대한 노장앞에서 놀란 것이다" 경렬한 결합이 시작되었다. Rausch는 그 영국작가의 그림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전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로 꼽히던 Ilja Repin의 초상화나 역사화를 모방하듯이... "당시 동독에는 서양의 미술시장과 같은 분주함이 없었다" 라고 Rausch는 회상한다. "그때 나는 나만의 길을 연구하기위해 끊임없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1990)중 Assisi의 기오토의 프레스코화와 Roma의 발투스의 회화는 또 하나의 결과물을 낳았다. 그때도 그가 자신만의 엄격한 어휘를 정확히 표현된 형상과 사물을 통해서 발전시키기위한 확고하고 엄격한 시기였다.(계속)